로베르 1세 (서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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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베르 1세는 922년 랭스에서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샤를 3세의 측근이었으나, 샤를 3세가 측근을 중용하자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923년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으나,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사후 성 콜롬베 수도원에 묻혔으나,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무덤이 파괴되어 시신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메인의 엘리스, 베아트리스 드 베르망두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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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1세 (서프랑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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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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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베르 1세 |
출생 | 866년경 |
사망 | 923년 6월 15일 |
사망 장소 | 소아송, 프랑스 |
통치 | |
작위 | 서프랑크 국왕 |
재위 기간 | 922년 6월 29일 – 923년 6월 15일 |
대관식 | 922년 6월 29일, 랭스 |
선임자 | 샤를 단순왕 |
후임자 | 루돌프 |
가문 | |
왕가 | 로베르 가 |
아버지 | 강건왕 로베르 |
어머니 | 투르의 아델라이드 |
배우자 | 앨리스 베아트리스 드 베르망두아 |
자녀 | 엠마, 서프랑크 왕비 위그 르 그랑 |
2. 생애
로베르는 네우스트리아와 앙주의 백작인 로베르 4세 강철공과 루이 경건왕의 딸 아델라이드의 아들이었다. 890년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1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했다.[7] 베아트릭스의 친정아버지 헤르베르트 1세는 샤를마뉴의 아들인 롬바르디아 왕 피피노 카를로만의 후손이었다. 로베르 1세는 자신의 첫 부인에게서 얻은 딸 아델라이드를[8] 후처 베아트릭스의 남동생인 뫼욱스와 수아송의 백작 헤르베르트 2세에게 시집보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 위그 르 그랑이며, 위그 카페의 아버지가 된다.
866년 9월 15일 아버지 로베르 르 포르가 브리사트 전투에서 바이킹족을 상대하다 전사하자, 그의 직위는 형 외드가 계승했다. 로베르는 886년 5월 12일 수도원장공 우고가 사망하자 브르타뉴브레톤변경백작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885년 형 외드와 함께 바이킹의 침입에 맞서 파리를 지켰고, 같은 해 비만왕 카를 3세에 의해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앙제, 투르, 오를레앙의 영지를 소유했으며, 형 외드에게 적자가 없어 파리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작위는 훗날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까지 별다른 작위가 없는 후손들에게 세습되었다.
외드가 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자, 로베르는 파리 백작 등 많은 지역의 영주가 되었고, 마몬티에 대수도원(Abbazia de Marmoutier) 원장에 임명되었다. 형 외드는 서프랑크 왕국 국왕으로 재직 중 동생 로베르 1세에게 푸아티에를 주었다.
2. 1. 왕위 계승 및 사망
898년 외드가 자녀 없이 죽자, 로베르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대신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3세 ''단순왕''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가신이 되었다. 외드는 샤를 3세 ''단순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했는데, 일설에는 로베르 1세의 부인 베아트릭스가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인 점을 고려하여 로베르 1세를 후계자로 내정했다고도 한다.[7]로베르는 바이킹족의 침입에 맞서 프랑크 왕국의 북부에서 계속 싸웠으며, 911년 샤르트르 전투에서 바이킹족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샤를 3세는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 바이킹족을 왕국 북부 노르망디에 거주하게 하는 대신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바이킹족 격퇴로 로베르의 명성은 높아졌고, 그는 강력한 귀족이 되었다. 샤를 3세가 로타링기아를 복속하고 로타링기아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자, 로베르를 중심으로 한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922년 6월 22일 샤를 3세는 탈출했고, 922년 6월 29일 혹은 6월 30일 랭스에서 로베르가 새 왕으로 선출되어 대주교 고티에와 상스의 발트에 의해 왕관을 받았다. 샤를 3세는 반발했고 곧 내전이 벌어졌다. 샤를 3세는 로트링겐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로트링겐으로 도주했다.
923년 6월 15일 샤를 3세 지지자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수아송 부근 전투에서 로베르 1세의 군대는 샤를의 군대를 이겼으나 로베르 1세는 전사했다. 그는 평소 병사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흰 수염을 투구 밖으로 드러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칼 또는 창에 맞아 죽었다. 그에게 칼을 던진 이는 백작 풀베르트라는 설과 샤를 3세가 던진 창에 찔려 죽었다는 설이 있다. 샤를 3세는 바로 로트링겐으로 되돌아갔지만, 일설에는 샤를 3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됐다고도 한다.
로베르 1세의 아들 위그 르 그랑은 왕위 계승을 요구하지 않았고, 923년 7월 13일 그의 사위인 부르군트 출신 라울이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 훗날 그의 손자 위그 카페가 카페 왕조를 세웠다. 위그 르 그랑은 샤를 3세의 군대에 맞서 싸워 수아송에서 퇴각시켰다.
로베르 1세는 사후 성 콜롬베 수도원에 묻혔다. 이 수도원은 620년 클로타르 2세가 설립한 곳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수도원이 파괴되어 그의 무덤과 시신은 실종되었다. 1842년 그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853년 수도원 근처 토굴에서 여러 무덤이 발굴되었지만 어떤 것이 그의 무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비고 |
---|---|---|
메인의 엘리스 | ||
베아트릭스 | 샤를마뉴의 후손,[7] 베르망두아 백작 헤르베르트 1세의 딸 |
4. 기타
로베르 1세는 네우스트리아와 앙주의 백작인 로베르 4세 강철공의 아들이자 오도의 동생이었다. 그의 가문은 카롤링거 왕조가 성장한 로베르티안 왕조 출신이었다.[7] 그는 885년 형 오도와 함께 바이킹의 침입에 맞서 파리를 지켰으며, 같은 해 비만왕 카를 3세에 의해 파리 백작에 임명되었다. 또한 앙제, 투르, 오를레앙의 영지를 소유했고, 마몬티에 대수도원의 원장에도 임명되었다.
898년 형 외드가 죽었을 때, 로베르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고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 3세 ''단순왕''을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계속 바이킹족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911년 샤르트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샤를 3세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는데 기여했다.
샤를 3세가 로타링기아 귀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자, 922년 로베르를 중심으로 한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922년 6월 29일 혹은 6월 30일 랭스에서 로베르 1세는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고, 923년 6월 15일 수아송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베르 1세의 사후, 그의 아들 위그 르 그랑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사위인 부르군트 출신 라울이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 로베르 1세는 성 콜롬베 수도원에 묻혔으나,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수도원이 파괴되어 그의 무덤과 시신은 실종되었다.
로베르 1세의 처가인 헤르베르티언 가문은 카롤링거 왕조의 분가였지만, 경건왕 루트비히에게 원한을 품고 로베르 1세의 즉위를 적극 지지하였다.
참조
[1]
서적
Schwennicke, Band II, Tafel 10
[2]
간행물
The Annals of Flodoard of Reims, 916–966
[3]
간행물
The Annals of Flodoard of Reims, 916–966
[4]
간행물
The Annals of Flodoard of Reims, 916–966
[5]
서적
Schwennicke, Band III Teilband 1, Tafel 49
[6]
간행물
The Annals of Flodoard of Reims, 916–966
[7]
문서
피피노 카를로만-베른하르트-피핀-헤르베르트 1세-아델라이드
[8]
문서
일설에는 베아트릭스의 딸이란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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